때때로 홀로 되고 다시 함께하는 우리네 모습을 담은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소개합니다. 겉 보기엔 귀엽고 예쁜 그림으로 채워진 작품들이지만,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상실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 함께하는 보살핌을 다루고 있어요. 물론 귀엽고 예쁜 그림 만으로도 힐링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에요.
[건전지 아빠], [건전지 엄마]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비디오 테잎을 보며 자란 세대로 필자는 스톱모션에 적지 않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개드릴 전승배 감독, 강인숙 작가의 두 작품은 양모로 만든 귀염뽀짝한 인형들이 등장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입니다.
부직포라는 말로도 익숙한 펠트기법으로 만든 양모인형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이 관객들이 빠지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생각이 들지만, 나이가 든 어른 관객들이 눈길이 갈만한 부분들도 넉넉합니다. 배경이 되는 미니어쳐 양옥집과 그 안을 꾸미는데 제작된 소품들은 마치 적지 않은 세월을 품은 듯 정겨움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안 쓰이는 전자기기가 없던 건전지의 전성기 시절을 겪은 관객분이 계실텐데요. 멀쩡한 건전지를 여기저기 빼다 끼워가며 쓴 기억이나 방전된 건전지를 충전해가며 사용한 기억에 친근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두 작품 모두 아이들을 둘러싼 보살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쉽게 알아채지 못하지만 늘 아이들을 보살펴주는 손길과 수고가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작품 속 주인공인 건전지들이 보이지 않는 이곳 저곳에 능력을 발휘해 사건 해결을 돕는 것 처럼요. 그렇게 일을 마친 건전지 아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힘들었던 일도 아무일 없던 듯 충전되는 몽글몽글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의 활약을 빠져있다 보면 작품의 특별한 기법 뒤에 스탭들이 쏟아낸 노력도 어렴풋하게나마 함께 느껴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전승배 감독과 강인숙 작가는 부부로 '토이빌'이라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오랜시간 함께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그림책으로도 출간되고 유튜브엔 메이킹 비디오가 올라오고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더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건전지 부부네에 다둥이 가정 지원은 충분히 되고 있는 거겠죠?
[혼자에 익숙해지는 법]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준은 20~30대의 나이로 회사에 다니는 자취생으로 보입니다. 갓 이별을 지나온 것 처럼 보이는 주인공은,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활동에서 교류를 찾는 것 처럼 혼자를 지나 주변과 함께하는 법을 배웁니다. 서평원 감독님은 GV에서 혼자 잘 지내는 것이 장려되는 추세와 그럴 수 밖에 없는 시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가족과 친구의 보이지 않는 지지가 있어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작업을 하셨다고 합니다.
2D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한 작품은 주인공이 새로운 운동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사냥을 하는 원시 부족생활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감독님은 특히 이 부분에서 단체생활로 생존가능했던 옛 사람의 습성이 돈으로 생존을 해결하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남아있을 거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작품 속 인물의 마음을 묘사한 장면들에서 독특하게 스톱모션 기법이 사용되었는데요, 성격과 취향를 묘사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에 먼저 눈길이 갑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 이리저리 바뀌는홀로 된 성준의 마음 속 모습에는, 뒤로 가서는 호랑이까지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혼자에 익숙해졌다 느낄 때 쯤 공허함과 함께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외로움을 호랑이로 형상화 했다고 합니다. 먼 옛날에는 혼자 물리칠 수 없던 두려움의 동물이 현시대에선 홀로 선 마음 속 위기를 상징하는 셈이죠.
또 다른 이별을 맞은 인물은 성준의 할머니입니다. 주인공이 할머니의 마음 속 공간에 함께 등장하는 스톱모션 장면에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한다는 것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감독님은 두 사람의 마음 속 장면에 등장하는 벽에 난 큰 구멍들은 각자 겪은 이별을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소재라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장면들 사이에 분위기가 다른 것, 그리고 다른 소재—호랑이와 꽃파도—가 쓰인 것은 두 사람이 겪은 상실의 크기가 다른 것과 서로 다른 모양의 감정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주셨습니다.
2D 장면에 쓰인 디지털 기법들이 세련된 느낌을 주면서도 주인공의 일상과 부족생활이 교차되는 지점엔 애니메이션 특유의 위트가 살아있습니다. 스톱모션의 경우 해당 파트의 전문 감독님과 스탭을 따로 섭외해 스튜디오에 함께 모여 작업했다고 하는데 두 가지 다른 기법이 스토리 안에서 잘 섞여 좋은 시너지를 낸 것 같습니다. 감독님은 아이디어를 묻는 질문에 평소 겪은 경험들을 에세이 집처럼 모아두었다가 작품 속 장면을 만들 때 쓴다는 답을 해주셨는데요, 차기작에선 일상적 소재가 또 어떤 신선한 방법으로 표현될 지 기대하게 됩니다.
[건축가 A]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마다 갖는 의미는 저마다 다른 모습이겠지만 그 중요성 만큼은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지나간 계기로 집 짓는 일을 떠나 있었던 건축가인 주인공에게 건너건너 소개를 받은 의뢰인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앞서 이야기 드린 [혼자에 익숙해지는 법] 처럼, 이 작품도 이별과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먼저 상실을 지나온 경험자와 이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동행하면서 경험자의 기억을 함께 들여다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풍성한 흰머리와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하는 분위기를 가진 재재 할머니는 건축가에게 새 집의 설계를 의뢰하러 옵니다. 이후 삶의 기억 이곳 저곳을 보여주며 건축가와 함께 집을 지을 재료들을 찾아나서게 되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 이곳저곳을 채운 소품들을 구경하며 집주인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만나곤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작품 속 건축가는 기초부터 마감까지 새로운 집을 위해 의뢰인의 기억 속에서 추억을 채집합니다. 여기서 집을 설계하고 짓는 어쩌면 현실적인 소재위에 동화적인 그림들로 이야기가 점점 세워지는데요. 그 중 우리가 평소 만질 수 없는 걸로 여기는 추억이 여러 질감과 물성을 가지는 재료로 탈바꿈하는 묘사들이 특히 신선합니다.
작품 속 집이 형태를 갖춰가면서 시종일관 귀엽고 이쁘고 몽글몽글한 장면에 담긴 이야기는 무거워지는 순간을 맞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마감에 들어가는 재료를 의뢰인 할머니의 가장 슬픈 기억에서 얻어와야 한다는 것. 상실을 돌아보고 아픈 기억에 다녀오는 것이 집을 짓는데 필요한 일이라는 건축가의 말을 놓고 보면, 마감으로 완성되는 집은 의뢰인의 좋은 기억과 슬픈 기억이 모두 한데 어울리는 화해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간의 여정에서 의뢰인과 교류해온 건축가도 조금씩 자신의 공간, 그리고 상실을 마주하고자 준비를 합니다.
이종훈 감독님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작과 통하는 부분이 추억이라는 소재라고 합니다. 감독님 스스로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추억이라는 점이 반영되었다고 설명을 하셨는데요. 이번 작품은 추억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만지고 가공하는 과정에 만들어지는 보금자리를 그리면서 추억과 장소,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인터뷰 속 지난 작품은 공개되어 있으니 얼른 보시고 못 본 사람 없게 널리 퍼트려주세요.
짧은 애니메이션들을 소개하는 짧지 않은 글을 준비해봤습니다. 글을 읽고도 그려지지 않는 장면은 작품 속 그림들로 꼭 직접 볼 기회를 기다려주세요. 그래도 여전히 아쉬운 부분은 감독님들의 다른 작품들로 채워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