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12월 14일 공동체 상영된 영화 [비닐하우스]에 대한 커튼콜 크루의 비평과 함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 [비닐하우스]를 소개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전적으로 믿어'야 할 것 같은 배우의 출연. 영화 외적인 수식으로도 기대를 갖기 충분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봤을때 남는 여운으로 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솔희 감독의 졸업 작품이자 장편 <비닐하우스>는 영화의 모티브와 이야기의 진행에 돌봄이라는 소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봄이 부재하는 곳에서 생기는 불편한 감정에 관객을 끌어들입니다. 끌어들인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각 인물들을 중심으로 커튼콜은 이번 뉴스레터를 채워봅니다
문정,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상황들
초반 부터 영화는 주인공, 문정의 상황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빠른 편집으로 필요한 부분까지만 보여지는 연출을 통해 주변 인물과의 관계에서 문정이 처한 위치가 가감없이 드러납니다. 문정은 돌봄 노동에 종사 하지만 그런 직업적 특징이 대중이 흔히 접하는 사회적 이슈를 묘사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문정의 직업윤리와 일에 쏟는 정성은 그 바깥을 보았을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돌봄의 관계들을 환기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런 불균형은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감상에서 공유되는 불편의 바탕이 되지만 이후 영화가 전개 되면서 이런 감정의 결이 조금 더 다양해집니다.
영화는 화옥의 사고 이후 스릴러의 얼개를 빌려옵니다. 어둠에 숨은 인물이 발각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나, 어설픈 속임수와 그것이 들키기 직전까지 가는 연출은 고전적이면서 잘 만든 장면들이었습니다. 여기부터 비현실성이 극의 전개에 스며드는데, 그럼에도 여느 관객들의 평가처럼 연출의 색깔과 배우들의 연기덕에 몰입은 쉽게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서 문정을 둘러싼 인물들은 문정의 경계심 안밖에서 그녀를 바라봅니다.
또 다른 인물은 문정의 엄마로 등장하는 춘화입니다. 중반 이후 타의로 사건의 중심으로 떠밀리게 되는 춘화가 이후 딸에게 받기 시작한 보살핌은 역설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을 지나온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와 더불어 문정이 바라는 아들과의 생활이 환기되면서 문정을 둘러싼 불균형한 가족관계의 이미지가 맞춰집니다. 이 부분은 과거에 대한 설명이 생략됨에도 불구하고, 관객에 따라서 문정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됩니다. 이런 전개 속에서 관객은 점점 문정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불편의 곁가지
영화가 진행되며 마지막까지 얽혀가는 불균형한 관계들, 스릴러로 구현된 시련 등에서 불편함은 쌓여가는데, 또 다른 결의 불편함이 곁가지로 함께 떠오릅니다. 문정과 대립하는 인물의 입장에도 함께 이입하거나, 그녀의 선택이 초래할 현실적 결과를 예상할 때 오는 불안, 혹은 그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앞서 얘기한 문정의 서사 바깥에서 다른 불편이 만들어집니다.
다만 이런 결의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다수의 관객은 문정에 대해 쉽사리 윤리적 낙인을 찍지는 않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선 안될 일들 투성이지만 조금 더 문정을 중심으로 감정을 쌓은 관객이라면 마지막 파국이 해소로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일방향으로 치우친 관계들이 모두 사라지기도 하지만 스릴러의 긴장을 유발하는 관계도 함께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또 일부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을 지나며 우연에 기반한 장치, 극적인 연출에서 느껴지는 비현실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며 불편한 감정이 가라앉았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을 가능한 극적으로 그린 것은 감독이 의도한 강한 밀어내기가 아닐까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이 점을 뒤집어 보면 결말 이후 관객이 연출과 배우의 연기에서 거리를 두지 못하면 해소되지 않는 불편이 여운으로 남을 수 있단 점도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다른 결의 불편을 느낀 관객들 중에는 결말 이후 예측되는 현실적 귀결이나 문정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서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안고 갈 수 있습니다. 또 태강의 선택은 비난의 여지가 크지만 드라마만은 울림이 있습니다. 자식이 떠난 노년 부부의 모습은 적지 않은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지점이 있고 태강이 바라던 운전을 하게되는 장면은 극 중 가장 밝은 분위기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태강 같은 다른 인물을 함께 고려할 때 결말을 마냥 해소로 보지 못할 여지가 커집니다.
돌본다는 것에 대해
감독님의 인터뷰 중 '불행포르노'라는 평을 한 관객이 있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등장인물이 그런 식으로 대상화 된 지점은 크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 평가의 뒤를 살피자면 객석을 떠날 때의 불편한 여운에 대해 생각이 나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과 함께 감독이 의도한 영화와의 거리감과 상영 후 관객이 느낀 정도도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은 저마다 다를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차이가 영화를 놓고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영화를 따라가며 결말이 문정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을 나타내는 지점들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이 결말의 상징적인 부분만을 가져왔을 때 한 쪽에선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시행착오로 보이거나, 반대쪽에서는 변호의 여지가 없는 파국적 귀결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나란히 이야기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불균형한 돌봄의 관계에 처한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이 결국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비닐하우스를 벗고 조금 더 스스로를 돌보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