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아의 딸] 우리가 책이나 영화속의 이야기를 접할 때,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내 주변에 비추어 평범한지 혹은 특별한지를 짚어보곤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인물과 장면 바깥의 이야기는 거기서 비어져나온 상상으로 채우곤 하죠. 전달된 이야기가 사실적이라 느껴지고 그 속의 인물이 공감을 이끌어 낸다면 우리는 풍부한 상상으로 이야기의 사이사이를 다채롭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종류의 사건의 피해자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그릴 때, 감독은 어떤 장면을 골라 관객에게 전달할지 고민이 더 커지겠죠. 작품이 감독의 손을 떠나게 되면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와 사회적 의미의 사이사이를 관객이 채우게 되니까요. 김정은 감독님의 [경아의 딸]을 보면서도 그런 고민에서 나온 하나의 대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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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연수가 겪는 사건의 앞뒤로 인물의 얼굴과 그를 둘러싼 공간을 비춥니다. 연수는 한때 가까웠던 인물에게 당한 폭력적 범죄로 이후 점점 고립되어 가는데요. 우리는 연수에게서 감정이 흘러넘치는 순간들도 보게 되지만, 대게는 공간과 연수가 겪는 상황과 분위기, 다시 그 속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연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건을 알게 된 직후 전 남자친구를 찾아간 재수학원, 시험감독 중인 교실에서 울리는 연수의 휴대전화, 사건의 형사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찾아가는 여러 공간에서 연수의 모습이 비치죠. 드러난 갈등이나 큰 감정의 동요가 없이도 공적인 공간에 놓인 연수와 거기서 발생하는 작은 부자연스러움에도 관객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수의 상황을 따라가게 됩니다. 짐작건대 이런 불안감들은 피해자분들이 겪을 수 있는 감정의 일부분이겠지만, 감독님의 선택으로 그분들의 내밀한 피해를 과다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전달 되어야할 부분들이 잘 골라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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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한편으로 영화에는 연수를 둘러싼 사적인 관계의 변화도 그리는데요. 하나 남은 가족인 경아와의 모녀 관계는 영화를 시작하는 영상통화에서부터 나란히 그려지게 되지만, 사건 직후에 틀어진 관계는 영화가 끝날때 까지 옛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과거에 가정의 가부장제에서 입은 상처를 돌보지 못하는 인물인 경아는 연수가 겪은 사건에 휩쓸리는 위치에서, 그 파도를 어떻게든 홀로 헤쳐 나가고자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딸과의 관계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감독님 자신도 인터뷰에서 집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대한 일화가 있다 할 만큼, 관객들을 영화 속 갈등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경아라는 인물이 맡고 있죠. 여기서 관객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 인물의 행동을 따라가며, 새로운 입장에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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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화는 연수가 겪은 사건과 모녀 관계를 두 기둥 삼아 이야기를 지어 올립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그 사이로 보이는 것들을 조금 더 지켜보면 바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들, 혹은 건너 건너 보고 듣는 맥락들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연수가 경아를 떠나 다시 전화 통화를 하기까지, 어쩌면 그 이전을 보더라도 자식을 독립시킨 부모 세대의 고립과 지지기반을 잃은 청년 세대가 고립을 택하는 과정이 영화의 바닥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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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전통적 지지 관계인 가족, 모녀 관계를 큰 줄기로 그리고 있습니다. 연수의 친구관계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죠. 그나마 등장하는 친구관계도 서술이 생략되거나 결국 연수의 안전거리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사건의 형사절차가 피해자분들을 움직이는 동기의 큰 부분임을 고려할 때, 이런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법률적인 도움의 한계가 이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관계의 설정은 사회초년생의 거주지와 인간관계가 진학, 직장에 좌우되는 우리 사회의 맥락을 놓고 본다면 연수의 또래들이 사는 현실과 닮아 보입니다. 관계 유지가 에너지를 투자해야 할 무언가라 느끼게 하는 환경과 시기를 지나고 나면, 주변에 남는 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탄원서를 전해주고 금전적 상담을 들어주는 동료교사, 경아의 부탁으로 연수에게 다른 공기를 환기해 주는 변호사 상순 등, 작게나마 도움을 주는 인물들은 오히려 연수의 주변으로 존재하던 관계에서 느슨한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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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초반부터 희미해 보이는 이런 주변으로부터의 지지는 연수를 둘러싼 공간이 바뀌면서 고립으로 더욱 선명해집니다. 유포된 영상에 비친 장소이자 엄마가 독립한 딸을 처음으로 이사시킨 공간인 오피스텔을 떠난 연수는 고시원에 입주하게 되는데요. 엄마의 연락이 닿을 틈조차 주지 않은 급박한 이동은 도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고시원이 가지는 단절이라는 이미지는 널리 퍼져있지만, 경제적으로 기우는 처지에 놓인 청년에게 대안이 되는 다른 공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 함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경아에게는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오랜 성장기를 보낸 지역에 연수를 받아줄 공간을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영화의 막바지에 경아는 줄곧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바닷가 공단 지역( 인천의 화수부두)을 떠납니다. 이것은 경아가 남편의 흔적을 벗어나 새로운 둥지를 찾는다는 면에서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그 목적지가 고향을 벗어난다고 잘라 말할 수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10년은 살아온 듯한 지역에 몇 남지 않은 친구를 두고 떠나는 것에선, 관계의 안전망이 없는 지역에서의 삶이 사람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게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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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영화제 3월 8일 상영회 현장에서의 동구 가정•성폭력통합상담소의 강지연 활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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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주인공을 둘러싸고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맥락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맞닿은 부분 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수는 쉽게 합의를 하거나 민사소송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울산 커튼콜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 함께 해주신 동구 가정•성폭력통합상담소의 강지연 활동가님께 소감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실제 상담소를 찾아온 분들이 영화의 엔딩에 나온 연수의 모습처럼 다시 일어설 에너지를 가질 수 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수가 경찰에 출석하거나, 변호사와의 상담, 법정에 나서는 장면에 대해 말씀을 덧붙여 주셨어요. 피해자분들이 이런 단계들이 어려워 할 수 있다며, 지역의 상담가들이 언제든 동행할 수 있는데 영화에 그런 묘사가 있으면 어땠을까 아쉬워 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수는 강한 인물입니다. 혼자서도 전 남자친구가 다니던 학원을 찾거나, 빠르게 이사를 가고, 필요하면 돈을 빌리려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비좁은 고시원 생활에도 청소를 하고, 비대면 과외로 생활을 이어나가려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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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제작일지에서 초반에 구성한 시나리오를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피해자의 모습을 피상적으로 그리는 것 같다는 이유로요. 그러면서 피해자를 직접 취재하려던 계획도 그분들의 입장에서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중단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영화는 그분들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봤을때 보이는 취약함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면을 딛고 일어선 연수는 피해자 다움이라는 구태를 넘어 우리가 보고싶은, 혹은 되고싶은, 다시 일어선 인물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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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아의 딸] 상영회 당일 GV 게스트로 참여해 주신 강지연 활동가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치시진 않으세요?"라고요.
활동가님께서는 "그럴 때도 있지만 피해자분들이 '선생님들이 옆에 계셔준 것만 해도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라고 해주시던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이 일의 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분이 계시다면
아래의 링크로 안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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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된 영화 [경아의 딸]은 소개된 OTT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2024.03.25. 기준)
(정확한 정보는 해당 제휴사에서 확인해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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